마음 같지 않고 변수투성이인 산이지만 다음에도 아이와 함께 #등산 #가족취미 #설악산
설악산에 가자는 내 요청에 아들의 대답이 "아 가기 싫은데"에서 "알겠어"로 바뀌기까지 오래 걸렸다. 주말은 게임하는 날이라고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아들을 어렵게 설득했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설악산 단풍 소식이 들려오니 마음이 앞섰다. 일정을 잡고 확인하니 비 소식이 있었다. 강수 확률 60%였다. 아이와 일정 조절을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얘기하다 '그렇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마!'를 뱉을 것 같았고 그 뒤는 수습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마침 월요일이 대체 휴일이었다. 토요일에 못 오르면 하루 날씨를 기다렸다가 일요일에 오르는 것도 염두에 두고 일단 출발했다. 아이에게 플랜 B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비가 와 숙소에 종일 머물 경우를 대비해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챙겼다.
엄마는 저녁 시간과 주말에 화가 많이 나 보여
이번에 갑작스러운 설악산행은 "엄마는 저녁 시간과 주말에 화가 많이 나 보이는데 왜 그런 것 같냐"는 아들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도 반복되는 패턴에 지쳐가며 원인이 뭘까 생각하던 터라 대화가 자연스레 흘러갔다. 저녁시간과 주말이면 아이와 만나는 거의 모든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나도 변하고 싶었다.
우리집의 저녁시간은 이렇다. 저녁에 아이들이 돌아오고 식사 준비 하는 시간이 되면 내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낮엔 난 뭐하고 지금 시간에 바쁜 거냐는 자책이 시작된다. 짠 하고 기대하는 저녁식사를 차리기에는 실력도 시간도 부족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점점 급해진다. 결국 저녁이 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어린이집에서 둘째를 데려온다. 둘째 아이가 이것저것 요청하기 시작하면 아이를 식탁에 앉혀 영상을 보여준다. 밥만 하면, 반찬만 꺼내면, 생선이 구워질 동안만 이거 보고 있으라고 하면서 서두른다. 작은 아이가 영상 보는 소리가 나면 큰 아이 방에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방에서 튀어나오며 "왜 쟤는 보고 나는 안 보냐!" 외친다.
엄마가 왜 저녁마다 화나는지가 궁금하다는 아이에게 나는 저녁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상황이 어렵다고 했다. 또 주말에는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아들이 아빠와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이제 주말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그 모습을 주말 내내 지켜보기가 힘들다. 주중에 참았다 주말에는 실컷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지만 엄마로서 주말 내내 아이를 이대로 두는 것이 괜찮은지 걱정된다고 했다. 내친김에 한 주는 게임을 충분히 했다면 한 주는 엄마와 산이든 박물관이든 다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아이는 예전 여행을 떠올리며 엄마와 여행 다니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방학 때 아이들과 서해안 일주를 했었는데 그때 매일 숙소를 바뀐 것이 어려웠는지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럼 제주도에서 한 집에서 오래 머물렀던 건 괜찮았는지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마니산이나 다녀오라는 남편
아이와 설악산에 다녀오겠다는 말에 남편은 강화도 마니산이나 다녀오라고 했다. 안 그래도 비 소식에 심란하던 차에 날씨를 보니 강화도엔 비 소식이 없다.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나는 설악산이 가고 싶으니까 설악산을 가기로 했다. 설악산에 다녀오고 싶은 이유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 키를 막 넘어서고 있는 아들과 높고 큰 설악산에 함께 다녀오고 싶었다. 정말 가고 싶은 이유는 가 봐야 알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주말 내내 게임하며 보내는 아이 생활이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 전에 변화의 계기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학생들과 산을 많이 다녀 본 친구가 아들이 빨리 치고 올라가는 코스를 좋아한다 하니 오색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산행 스타일이 생기니 코스 정하기가 수월해졌다. 초기에 초보자가 오르기 쉽다고 해서 갔던 소백산을 다녀와 아이는 지루하다고 했다. 그다음에 올랐던 치악산은 가장 빠르게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가파른 등산로를 택했는데 아이는 이게 우리 스타일이라며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의 빨리 갔다 빨리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이의 그 마음이 변치 않았기에 우리 스타일도 변치 않았다. 그래도 지루한 소백산에서 건진 것이 있다면 정상 데크에 쪼르륵 앉아 사람들이 먹던 컵라면이 부러워 우리도 컵라면과 보온병을 챙겨 다니기 시작했다. 오색 코스는 설악산 대청봉까지 가장 단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다. 인터넷 후기에서 98%가 오르막길이라는 후기를 봤다. 코스를 정했으니 날씨를 대비해 우비를 챙기고 아빠와 발 크기가 같아진 아이에게 아빠 등산화를 챙겨줄 일이 남았다.
설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분명 설악산이 저기 있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 두 시간 반을 달려 숙소에 닿았다. 등산로 바로 앞에 숙소가 만실이라 등산로까지 차로 20분 거리에 숙소를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분명히 있어야 할 설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에 싸인 산 안에서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도 안 보일 것 같다.
아이와 하루 더 묵으며 내일 산에 오르자고 했다. 대신 주말에 하는 게임을 숙소에서 하자고 협상했다. 방 안에서 종일 뒹굴대며 나는 유튜브를 보고 아이는 게임을 하며 지내다 보니 지금 뭐하나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게 바로 산에 가는 과정이지" 하고 정신 차려 본다. 나 원하는 걸 하려면 상대 원하는 것도 들어줘야 하는 법이다. "내가 왜 아이에게 게임을 하게 했을까" 하고 긴 과정을 뒤적거려 봐야 지금 상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 결과일 터였다. 지금 최선이 무엇인지 살피는데 힘쓰자 싶었다.
다행히 다음날 강수 확률은 20-30%였다. 하루 더 연장하려니 숙박비가 어제의 세 배가 되어 있다. 엄마는 매일 숙소를 바꿔 여행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아이와 상황을 공유하니 자기는 짐 싸서 움직이기 싫다고 한다. 숙박비를 결재하고 났더니 청구서 날아올 날은 한참 멀었고 당장 나도 안 움직여도 되니 편했다.
잠을 잘 못 잤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새벽 두 시 반이었다. 숙소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엄마랑 긴 여행을 가자는 말에 아이가 질색했던 게 떠올라 벌떡 일어나 졌다. 내가 저런 소리를 들어가며 무슨 산을 오르고 여행을 가겠다고 하나 같은 생각들로 차오르니 누울 수가 없다. 씩씩대며 앉아있다 이러다 산에 못 가지 싶어 5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었다. 눈뜨니 8시다. 짐은 전날에 다 싸 놓았지만 라면 물 끓여 넣고, 숙소 정리하고, 쓰레기 버리려니 마음은 급한데 손발은 더디다.
등산로 입구까지 네비를 찍어보니 40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서울에서 알아본 시간과 현장에서 다시 알아보는 시간이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두 배나 차이가 난다. 급할수록 천천히, 서두르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장장 4시간을 올라야 한다. 아이와 갈 땐 평균 한 시간씩 더 걸렸으니 5시간을 그것도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한라산에 시간 제한이 있는 줄 몰랐다가 강제 하산했던 적이 있다. 재도전하며 새벽 산행을 하려다 아이가 등산로 입구의 찬 바람에 놀래 “더 못 가겠어” 하고 멈춰 섰었다. 높은 산을 등 떠밀어 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 아침밥 잘 먹이고 아침해가 떠올라 따스한 기운이 시작될 때 길을 나서야 모든 게 원활할 터였다. 점심을 정상에서 먹어야 할 것 같아 시간을 재게 되지만 아이 컨디션을 우선해야 가는 만큼의 등산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아이가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먹고 반 그릇을 더 먹겠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주차를 하고 왔다. 대청봉 다녀온다 하니 종일 주차비 만 원을 받았다. 배낭 하나씩 메고 드디어 출발이다. 시간은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을 가다
왕년에 산 좀 타봤다는 남편은 아이들과 지리산에 가자 하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라고 했었다. 막상 노고단을 올라가면서는 "길이 많이 좋아졌네" 해서 웃겼다.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왔었냐 물으면 20년, 30년 전 기억을 더듬는다. 설악산 간다 하니 이번에도 남편은 걱정부터 했다. 이번에 얼마나 옛날 얘기하는 거냐며 가볍게 넘겼다.
식당에서 나와 아스팔트 오르막을 십 분쯤 걸으니 탐방지원센터가 나왔다. 설악산 글씨 조형물 앞에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들은 시작부터 얼른 올라갔다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다리 건너며 개울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물가에서 등산화를 닦고 있다. 새벽 산행을 하고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일 테다. 이때, 사람들이 신발 씻는 모습을 보고 정상부의 날씨를 추측할 실력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신발들을 씻지 갸웃하고는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 채 지나쳤다. 듣던 대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힘들 때 즈음 오른쪽, 왼쪽으로 쉼터가 나타났다. 아마도 이건 예전에 없던 것이겠지 싶어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쉼터는 1부터 시작해 6까지 이어졌다. 숨이 차면 쉼터로 빠져 물 한 모금 먹고, 간식도 먹으며 쉬어갔다.

잘 갖춰진 오색코스의 쉼터모습
유명한 설악의 단풍을 기대했지만 이제 막 시작이었다. 너무 빨리 왔다. 진짜 멋있다는 설악의 단풍을 만나는 건 다음을 기약해본다. 오늘은 설악산과 첫 만남을 갖는 것으로 만족이다. 앞서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첫 산행에서 발에 진흙이 묻는다며 오르는 내내 툴툴대던 아이는 어느새 커버리고 없다. 아이는 나보다 조금씩 앞서가면서 간간히 나에게 "엄마, 쉬어갈까?"하고 물어왔다. 산에서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는 그 사이 또 컸다. 키도 나만큼 커진 아이는 금세 자기 리듬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몸이 풀렸다. 그동안 아이와 산행하며 이야기 나누는 맛도 쏠쏠했는데 그러려면 완만하게 지루한 산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좁은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오르느라 대화할 짬이 없다. 마지막 OK쉼터를 지나자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오르막길이다. 간간이 나오는 표지판을 보며 얼마나 왔는지 확인했다. 등산 앱에서 1km마다 ‘띵동’ 소리와 함께 누적거리를 알려왔다.

단풍이 이제 막 시작했던 설악산.
높고 큰 산에선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친다. 첫 번째 쉼터에서 만난 부모님과 성인이 된 아들이 우리 아들에게 사탕을 주셨다. 다음 쉼터에서 뒤처져 쉬고 있는 아버지만 만났다. 그다음 만남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늦어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가보겠다며 아들이 온 길을 다시 내려갔다. 정상 마지막 구간 전에 혼자 올라가셨던 어머니를 만났다. "왜 벌써 내려가시냐" 물었더니 날이 너무 안 좋아 내려가는 중이라 했다. 아이 데리고 얼른 내려가라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지금 내려가긴 너무 아까운데" 한번 올라오기도 어렵지만 웬만해선 또 중간에 내려오지도 않는 우리 아드님이다. 대청봉까지 1.3km를 남겨놓은 쉼터였다. 그러나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심상치가 않다. 쉼터의 바로 위로 이어진 길이 안개로 보이지 않는다. 안갯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우비가 그야말로 쫄딱 젖어있다.

대청봉 1.3km를 남기고 올라가는 길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강수확률이 60%로 바뀌어 있다
날씨를 다시 확인해보니 20-30%였던 강수확률이 60%로 바뀌어 있다.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아이와 함께 우비 꺼내 입고 하산 방향으로 틀었다. 아들과 정상 맛을 봐야 그 기세로 다음 산을 기약할 수 있을텐데 싶어 아쉬웠지만 당장은 빗길에 내려가는 게 큰일이었다. 가파른 길을 올라왔으니 젖은 내리막길이 이어질 터였다. 하산길에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셋이나 봤다. 안 넘어지려 발가락마다 어찌나 힘을 주며 내디뎠던지 허벅지가 얼얼해졌다. 발바닥 전체로 한 걸음 한 걸음 꼭 꼭 걸으며 아이와 둘 다 넘어지지 않고 출발했던 입구까지 도착했다.
비가 와도 좋았다. 다칠까 조심스러웠지만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볼까 싶었다. 우비를 준비하지 않고 온 아저씨가 머리카락, 배낭, 옷에 비를 담고 걸어갔다. 우중산행이 처음이 아닌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비오니 너무 짜증 난다고 했다.
"앞으로 천 미터 넘는 산은 다시는 안 갈 거야"
"등산 초보가 왜 이렇게 높은 산만 가!"
하필 설악산은 시야가 터지기 직전에 비를 만났다. 그래서 짜증에서 자부심과 자랑 모드로 전환할 새 없이 하산하게 되었다. 내려오는 내내 아이가 짜증 냈다는 얘기다. 다 내려와 들으니 아이 옷이 잠바까지 세 겹을 입었는데 우비까지 입으니 너무 더웠다고 했다. 아이가 왜 짜증을 내는지 궁금해 할 여유가 있었으면 중간 옷을 하나 벗겨 짜증을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짜증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고 여겨지기보다 또 그런다 싶으니 더 이상 관심이 안 갔다. 다 와서지만 그럴 땐 옷을 한 겹 벗고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줬다. 나도 하산해 여유가 생겼는지 넘어지지 않고 도착한 것에 초점 맞춰 기뻐하고 축하했다.

아빠만큼 발이 커진 아들. 산에서 엄마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장거리를 운전해야 해서 숙소를 잡고 쉬었다 출발하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우중산행은 고되었다. 아이는 어디도 들리지 않고 올라가고 싶다고 한다. 산행 후 바로 운전한 적은 없었는데 어쩔까 고민하다 차 안에서 옷 갈아입고 정상에서 못 먹은 라면 먹고 쉬엄쉬엄 가보기로 했다. 다리가 후덜거리고 잠이 와서 혼났다. 휴게소마다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우물거리며 어렵게 돌아왔다. 다음엔 그런 상황에서 쉬는 시간을 갖고 운전하는 게 낫겠다고 스스로에게 안내해본다.
여기까지가 ‘설악산 대청봉 가다 만 이야기’다. 이렇게 가다 만 적은 없어서 이런 경험은 서로 기억에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궁금하다. 그걸 알려면 또 다음 산행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parents

안녕나무
육아하는 엄마
전산일하다 백일출가. 가정을 수행처 삼아 육아 십 년. 번아웃이 반복되어 나를 관찰 중. 대충 재밌고 가볍게 살려 노오력합니다. 일상의 중력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씁니다.
마음 같지 않고 변수투성이인 산이지만 다음에도 아이와 함께 #등산 #가족취미 #설악산
설악산에 가자는 내 요청에 아들의 대답이 "아 가기 싫은데"에서 "알겠어"로 바뀌기까지 오래 걸렸다. 주말은 게임하는 날이라고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아들을 어렵게 설득했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설악산 단풍 소식이 들려오니 마음이 앞섰다. 일정을 잡고 확인하니 비 소식이 있었다. 강수 확률 60%였다. 아이와 일정 조절을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얘기하다 '그렇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마!'를 뱉을 것 같았고 그 뒤는 수습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마침 월요일이 대체 휴일이었다. 토요일에 못 오르면 하루 날씨를 기다렸다가 일요일에 오르는 것도 염두에 두고 일단 출발했다. 아이에게 플랜 B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비가 와 숙소에 종일 머물 경우를 대비해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챙겼다.
엄마는 저녁 시간과 주말에 화가 많이 나 보여
이번에 갑작스러운 설악산행은 "엄마는 저녁 시간과 주말에 화가 많이 나 보이는데 왜 그런 것 같냐"는 아들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도 반복되는 패턴에 지쳐가며 원인이 뭘까 생각하던 터라 대화가 자연스레 흘러갔다. 저녁시간과 주말이면 아이와 만나는 거의 모든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나도 변하고 싶었다.
우리집의 저녁시간은 이렇다. 저녁에 아이들이 돌아오고 식사 준비 하는 시간이 되면 내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낮엔 난 뭐하고 지금 시간에 바쁜 거냐는 자책이 시작된다. 짠 하고 기대하는 저녁식사를 차리기에는 실력도 시간도 부족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점점 급해진다. 결국 저녁이 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어린이집에서 둘째를 데려온다. 둘째 아이가 이것저것 요청하기 시작하면 아이를 식탁에 앉혀 영상을 보여준다. 밥만 하면, 반찬만 꺼내면, 생선이 구워질 동안만 이거 보고 있으라고 하면서 서두른다. 작은 아이가 영상 보는 소리가 나면 큰 아이 방에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이 방에서 튀어나오며 "왜 쟤는 보고 나는 안 보냐!" 외친다.
엄마가 왜 저녁마다 화나는지가 궁금하다는 아이에게 나는 저녁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상황이 어렵다고 했다. 또 주말에는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아들이 아빠와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이제 주말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그 모습을 주말 내내 지켜보기가 힘들다. 주중에 참았다 주말에는 실컷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지만 엄마로서 주말 내내 아이를 이대로 두는 것이 괜찮은지 걱정된다고 했다. 내친김에 한 주는 게임을 충분히 했다면 한 주는 엄마와 산이든 박물관이든 다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아이는 예전 여행을 떠올리며 엄마와 여행 다니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방학 때 아이들과 서해안 일주를 했었는데 그때 매일 숙소를 바뀐 것이 어려웠는지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럼 제주도에서 한 집에서 오래 머물렀던 건 괜찮았는지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마니산이나 다녀오라는 남편
아이와 설악산에 다녀오겠다는 말에 남편은 강화도 마니산이나 다녀오라고 했다. 안 그래도 비 소식에 심란하던 차에 날씨를 보니 강화도엔 비 소식이 없다.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나는 설악산이 가고 싶으니까 설악산을 가기로 했다. 설악산에 다녀오고 싶은 이유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 키를 막 넘어서고 있는 아들과 높고 큰 설악산에 함께 다녀오고 싶었다. 정말 가고 싶은 이유는 가 봐야 알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주말 내내 게임하며 보내는 아이 생활이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 전에 변화의 계기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학생들과 산을 많이 다녀 본 친구가 아들이 빨리 치고 올라가는 코스를 좋아한다 하니 오색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산행 스타일이 생기니 코스 정하기가 수월해졌다. 초기에 초보자가 오르기 쉽다고 해서 갔던 소백산을 다녀와 아이는 지루하다고 했다. 그다음에 올랐던 치악산은 가장 빠르게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가파른 등산로를 택했는데 아이는 이게 우리 스타일이라며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의 빨리 갔다 빨리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이의 그 마음이 변치 않았기에 우리 스타일도 변치 않았다. 그래도 지루한 소백산에서 건진 것이 있다면 정상 데크에 쪼르륵 앉아 사람들이 먹던 컵라면이 부러워 우리도 컵라면과 보온병을 챙겨 다니기 시작했다. 오색 코스는 설악산 대청봉까지 가장 단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다. 인터넷 후기에서 98%가 오르막길이라는 후기를 봤다. 코스를 정했으니 날씨를 대비해 우비를 챙기고 아빠와 발 크기가 같아진 아이에게 아빠 등산화를 챙겨줄 일이 남았다.
설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분명 설악산이 저기 있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 두 시간 반을 달려 숙소에 닿았다. 등산로 바로 앞에 숙소가 만실이라 등산로까지 차로 20분 거리에 숙소를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분명히 있어야 할 설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에 싸인 산 안에서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도 안 보일 것 같다.
아이와 하루 더 묵으며 내일 산에 오르자고 했다. 대신 주말에 하는 게임을 숙소에서 하자고 협상했다. 방 안에서 종일 뒹굴대며 나는 유튜브를 보고 아이는 게임을 하며 지내다 보니 지금 뭐하나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게 바로 산에 가는 과정이지" 하고 정신 차려 본다. 나 원하는 걸 하려면 상대 원하는 것도 들어줘야 하는 법이다. "내가 왜 아이에게 게임을 하게 했을까" 하고 긴 과정을 뒤적거려 봐야 지금 상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 결과일 터였다. 지금 최선이 무엇인지 살피는데 힘쓰자 싶었다.
다행히 다음날 강수 확률은 20-30%였다. 하루 더 연장하려니 숙박비가 어제의 세 배가 되어 있다. 엄마는 매일 숙소를 바꿔 여행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아이와 상황을 공유하니 자기는 짐 싸서 움직이기 싫다고 한다. 숙박비를 결재하고 났더니 청구서 날아올 날은 한참 멀었고 당장 나도 안 움직여도 되니 편했다.
잠을 잘 못 잤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새벽 두 시 반이었다. 숙소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엄마랑 긴 여행을 가자는 말에 아이가 질색했던 게 떠올라 벌떡 일어나 졌다. 내가 저런 소리를 들어가며 무슨 산을 오르고 여행을 가겠다고 하나 같은 생각들로 차오르니 누울 수가 없다. 씩씩대며 앉아있다 이러다 산에 못 가지 싶어 5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었다. 눈뜨니 8시다. 짐은 전날에 다 싸 놓았지만 라면 물 끓여 넣고, 숙소 정리하고, 쓰레기 버리려니 마음은 급한데 손발은 더디다.
등산로 입구까지 네비를 찍어보니 40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서울에서 알아본 시간과 현장에서 다시 알아보는 시간이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두 배나 차이가 난다. 급할수록 천천히, 서두르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장장 4시간을 올라야 한다. 아이와 갈 땐 평균 한 시간씩 더 걸렸으니 5시간을 그것도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한라산에 시간 제한이 있는 줄 몰랐다가 강제 하산했던 적이 있다. 재도전하며 새벽 산행을 하려다 아이가 등산로 입구의 찬 바람에 놀래 “더 못 가겠어” 하고 멈춰 섰었다. 높은 산을 등 떠밀어 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 아침밥 잘 먹이고 아침해가 떠올라 따스한 기운이 시작될 때 길을 나서야 모든 게 원활할 터였다. 점심을 정상에서 먹어야 할 것 같아 시간을 재게 되지만 아이 컨디션을 우선해야 가는 만큼의 등산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아이가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먹고 반 그릇을 더 먹겠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주차를 하고 왔다. 대청봉 다녀온다 하니 종일 주차비 만 원을 받았다. 배낭 하나씩 메고 드디어 출발이다. 시간은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을 가다
왕년에 산 좀 타봤다는 남편은 아이들과 지리산에 가자 하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라고 했었다. 막상 노고단을 올라가면서는 "길이 많이 좋아졌네" 해서 웃겼다.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왔었냐 물으면 20년, 30년 전 기억을 더듬는다. 설악산 간다 하니 이번에도 남편은 걱정부터 했다. 이번에 얼마나 옛날 얘기하는 거냐며 가볍게 넘겼다.
식당에서 나와 아스팔트 오르막을 십 분쯤 걸으니 탐방지원센터가 나왔다. 설악산 글씨 조형물 앞에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들은 시작부터 얼른 올라갔다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다리 건너며 개울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물가에서 등산화를 닦고 있다. 새벽 산행을 하고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일 테다. 이때, 사람들이 신발 씻는 모습을 보고 정상부의 날씨를 추측할 실력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신발들을 씻지 갸웃하고는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 채 지나쳤다. 듣던 대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힘들 때 즈음 오른쪽, 왼쪽으로 쉼터가 나타났다. 아마도 이건 예전에 없던 것이겠지 싶어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쉼터는 1부터 시작해 6까지 이어졌다. 숨이 차면 쉼터로 빠져 물 한 모금 먹고, 간식도 먹으며 쉬어갔다.
잘 갖춰진 오색코스의 쉼터모습
유명한 설악의 단풍을 기대했지만 이제 막 시작이었다. 너무 빨리 왔다. 진짜 멋있다는 설악의 단풍을 만나는 건 다음을 기약해본다. 오늘은 설악산과 첫 만남을 갖는 것으로 만족이다. 앞서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첫 산행에서 발에 진흙이 묻는다며 오르는 내내 툴툴대던 아이는 어느새 커버리고 없다. 아이는 나보다 조금씩 앞서가면서 간간히 나에게 "엄마, 쉬어갈까?"하고 물어왔다. 산에서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는 그 사이 또 컸다. 키도 나만큼 커진 아이는 금세 자기 리듬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몸이 풀렸다. 그동안 아이와 산행하며 이야기 나누는 맛도 쏠쏠했는데 그러려면 완만하게 지루한 산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좁은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오르느라 대화할 짬이 없다. 마지막 OK쉼터를 지나자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오르막길이다. 간간이 나오는 표지판을 보며 얼마나 왔는지 확인했다. 등산 앱에서 1km마다 ‘띵동’ 소리와 함께 누적거리를 알려왔다.
단풍이 이제 막 시작했던 설악산.
높고 큰 산에선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친다. 첫 번째 쉼터에서 만난 부모님과 성인이 된 아들이 우리 아들에게 사탕을 주셨다. 다음 쉼터에서 뒤처져 쉬고 있는 아버지만 만났다. 그다음 만남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늦어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가보겠다며 아들이 온 길을 다시 내려갔다. 정상 마지막 구간 전에 혼자 올라가셨던 어머니를 만났다. "왜 벌써 내려가시냐" 물었더니 날이 너무 안 좋아 내려가는 중이라 했다. 아이 데리고 얼른 내려가라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지금 내려가긴 너무 아까운데" 한번 올라오기도 어렵지만 웬만해선 또 중간에 내려오지도 않는 우리 아드님이다. 대청봉까지 1.3km를 남겨놓은 쉼터였다. 그러나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심상치가 않다. 쉼터의 바로 위로 이어진 길이 안개로 보이지 않는다. 안갯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우비가 그야말로 쫄딱 젖어있다.
대청봉 1.3km를 남기고 올라가는 길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강수확률이 60%로 바뀌어 있다
날씨를 다시 확인해보니 20-30%였던 강수확률이 60%로 바뀌어 있다.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아이와 함께 우비 꺼내 입고 하산 방향으로 틀었다. 아들과 정상 맛을 봐야 그 기세로 다음 산을 기약할 수 있을텐데 싶어 아쉬웠지만 당장은 빗길에 내려가는 게 큰일이었다. 가파른 길을 올라왔으니 젖은 내리막길이 이어질 터였다. 하산길에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셋이나 봤다. 안 넘어지려 발가락마다 어찌나 힘을 주며 내디뎠던지 허벅지가 얼얼해졌다. 발바닥 전체로 한 걸음 한 걸음 꼭 꼭 걸으며 아이와 둘 다 넘어지지 않고 출발했던 입구까지 도착했다.
비가 와도 좋았다. 다칠까 조심스러웠지만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볼까 싶었다. 우비를 준비하지 않고 온 아저씨가 머리카락, 배낭, 옷에 비를 담고 걸어갔다. 우중산행이 처음이 아닌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비오니 너무 짜증 난다고 했다.
"앞으로 천 미터 넘는 산은 다시는 안 갈 거야"
"등산 초보가 왜 이렇게 높은 산만 가!"
하필 설악산은 시야가 터지기 직전에 비를 만났다. 그래서 짜증에서 자부심과 자랑 모드로 전환할 새 없이 하산하게 되었다. 내려오는 내내 아이가 짜증 냈다는 얘기다. 다 내려와 들으니 아이 옷이 잠바까지 세 겹을 입었는데 우비까지 입으니 너무 더웠다고 했다. 아이가 왜 짜증을 내는지 궁금해 할 여유가 있었으면 중간 옷을 하나 벗겨 짜증을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짜증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고 여겨지기보다 또 그런다 싶으니 더 이상 관심이 안 갔다. 다 와서지만 그럴 땐 옷을 한 겹 벗고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줬다. 나도 하산해 여유가 생겼는지 넘어지지 않고 도착한 것에 초점 맞춰 기뻐하고 축하했다.
아빠만큼 발이 커진 아들. 산에서 엄마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장거리를 운전해야 해서 숙소를 잡고 쉬었다 출발하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우중산행은 고되었다. 아이는 어디도 들리지 않고 올라가고 싶다고 한다. 산행 후 바로 운전한 적은 없었는데 어쩔까 고민하다 차 안에서 옷 갈아입고 정상에서 못 먹은 라면 먹고 쉬엄쉬엄 가보기로 했다. 다리가 후덜거리고 잠이 와서 혼났다. 휴게소마다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우물거리며 어렵게 돌아왔다. 다음엔 그런 상황에서 쉬는 시간을 갖고 운전하는 게 낫겠다고 스스로에게 안내해본다.
여기까지가 ‘설악산 대청봉 가다 만 이야기’다. 이렇게 가다 만 적은 없어서 이런 경험은 서로 기억에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궁금하다. 그걸 알려면 또 다음 산행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parents
안녕나무
육아하는 엄마
전산일하다 백일출가. 가정을 수행처 삼아 육아 십 년. 번아웃이 반복되어 나를 관찰 중. 대충 재밌고 가볍게 살려 노오력합니다. 일상의 중력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씁니다.
아이와 산에 오르는 방법 시리즈
01 다시, 아이와 산을 오르다
02 정상까지 안 가도 산행은 산행
03 가족이 합심해 엉망으로 만든 산행
04 도전! 한라산 오르기
05 아이와 함께 쓴 계룡산 산행기
06 죽으려고 환장하고 떠난 가족 지리산 종주
07 설악산 대청봉 가다 만 이야기
08 태풍이 다가오는 지리산에서